왜 우리는 변화를 체감하지 못할까? 특별히 둔감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것은 ‘기득권 도둑들’이 수사기관과 언론을 장악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권력과 변화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권력의 선의를 믿거나 사익 추구를 의심하거나 하는 양자택일로 귀결되고 있는 셈이다.
/ 들어가는 글. 세상은 왜 바뀌지 않는가?
한국 사회에서 ‘좌파’를 말하는 것은 색깔론의 희생양이 될 여지가 있어 미국식 혁신주의(progressivism)를 번역하여 차용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유래가 무엇이든 ‘진보’란 결국 이상을 향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두가 평등하게 잘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과 각자도생의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개인이 사회를 이끄는 것이 현실이라는 주장 중 이상에 더 가까운 것은 전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진보’했다고 평가하려면 모두가 평등하게 누릴 권리가 조금이라도 확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1. 진보 또는 보수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젊은 세대에게 가르쳐온 것은 실제로 진보가 아닌 시장원리였다. 실상 이 사회가 ‘진보’라고 불러온 이념과 사상의 어떤 덩어리들은 독재에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를 쟁취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표현해 왔다는 점에서 좀 더 엄격한 시장원리의 구현이라는 요구에 편승해 온 측면이 있다.
/ 2. 이익과 손해의 세계
사회가 더 나아지기 위해서 진보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거나 보수의 정신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것은 대의명분에 기반한 주장이다. 대의명분의 세계는 총체적 정합성을 추구한다. 대의명분을 세운다는 것 자체가 많은 사람의 동의를 구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원리를 제시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의명분을 제대로 주장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논증을 통해 반론에 다시 반론을 가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이 영속적으로 필요하다.
/ 2. 이익과 손해의 세계
또 제퍼슨은 자신이 지식인이었는데도 농민, 즉 ‘보통 사람’이 직관적으로 형성한 도덕이나 윤리가 대학교수의 그것에 못지않다는 등의 논리를 들어 목가적 생활에 기초한 자유방임적 정치관을 고수했다. 제퍼슨의 이러한 면모는 비주류로서 기득권에 속한 기성 교회를 반대하는 복음주의 교파들의 구미에 맞았다. 따라서 한쪽은 합리적 비판의 차원에서, 또 한쪽은 어떤 직관의 영역에서 기성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는 이들이 단지 공통의 혐오감만으로 기묘한 동맹을 맺게 되었다는 것이 호프스태터의 분석이다.
/ 5. 진보와 퇴행의 변주
연방파와 공화파에 속한 지식인들은 생산적 논쟁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결국 유권자를 설득해야 하는 대의민주제의 특성상 실제 정치의 현실은 심도 있는 논의보다는 정치 공세가 주가 되었다. 각 주의 자치권과 연방정부의 통합적 권한이 동시에 보장되는 미국의 현재는 이런 정치 현실을 거치며 형성되었다.
/ 5. 진보와 퇴행의 변주
브라인언은 1890년대에 민주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대선 후보로만 세 번 선출되었다. 이 인물이 흥미로운 것은 북동부 자본가와 기업가들로 구성된 기득권에 대항하는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말년에는 진화론을 거부하는 사회적 퇴행의 전면에 섰다는 것이다.
/ 5. 진보와 퇴행의 변주
결국, 브라이언의 일생은 ‘주류 기득권에 대한 반대’라는 일관적 행로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일관된 ‘반대의 정치’였다. ‘반대의 정치’에서는 대상을 반대하기 위한 논리를 동원하는 것 자체가 중요할 뿐, ‘반대’라는 맥락 내의 가치관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 5. 진보와 퇴행의 변주
경남권 특히 부산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과거에는 ‘민주 세력’의 주요 근거지였다. 그러나 3당 합당 이후 ‘우리가 남이가’ 시대가 오면서 ‘민주 세력’은 호남에 갇힌 형국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이 호남에 대한 지역적 차별 정서와 맞물리면서 ‘민주 세력’은 정치 활동에 있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 6. 한쪽으로 쏠리는 진자 운동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바로 이런 국면에서 치러졌다.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은 민주당 권력이 기득권인 금융 권력과 결별하지도 못하면서 자신들에게 사회문화적 정의를 강요(?)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생각한 백인 기득권의 퇴행적 저항이었다.
/ 7. 진정한 변화의 힘
체제의 구성원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본인들의 의사를 통치에 반영할 것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내는 일은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넓게 보면 왕조 시대의 농민 반란도 이런 사례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란에 참여한 농민을 달래기 위해 왕이 나서 민중에 ‘당근’을 주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민주주의의 여부는 단지 피통치자들의 목소리를 통치에 반영하는 것을 넘어, 체제의 원리로서 그러한 일을 보장하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 8.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
사회운동은 자신의 지분에 비례한 배당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 체제적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마련하는 데 힘써야 한다. 가령 과거의 시도가 실패했다면, 그러한 시도를 한 사람들을 배제하거나 거부할 것이 아니라 실패의 이유를 따져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 10. 체제에 어떻게 도전할 것인가
“도망 안 가?” 남자가 말했다.
차라리 이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이 남자를 죽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여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시간의 타래가 감길 때마다 그 생각은 퇴색되었다가 덧칠되고, 희미해졌다가 견고해지길 수없이 반복하는 변덕을 부리게 되지만.
“도망가 줘.”
/ 1. 당신이 시작한 이야기
따가운 폭발음이 터지기 직전에 여자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도망쳐.”
/ 1. 당신이 시작한 이야기
여자가 그랬듯, 여준 역시 차라리 이때 복잡하게 굴 것 없이 바로 그녀를 죽였다면 좋았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오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이야기다.
/ 1. 당신이 시작한 이야기
대재난 때문에 사람들이 특별히 잔인하게 변모한 건 아니었다. 그저 4만 명 넘는 유령의 무게를 감내하고 걷기엔 삶이 너무 험준한 탓이었다.
/ 2. 당신이 마주한 이야기
수풀과 초목 근처를 지나갈 때면 동물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다람쥐와 까치가 떼를 지어있었고 간혹 제법 큰 고라니도 지나갔다. 그들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구렁이가 4차선 도로를 건너는 걸 숨죽이고 쳐다보다가, 막상 눈앞에서 동물이 사라지면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와서는 안 될 곳에 함부로 침입한 기분이었다. 바람 소리만 가득한 유령도시에선 발소리를 내는 것마저 불경하게 들렸다.
/ 2. 당신이 마주한 이야기
턱을 치고 올라오는 호흡을 견디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옆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었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있었다. 도시에 들어와서 본 것 중 그녀에게 가장 충격을 준 건 4차선 위의 구렁이도, 포탄처럼 날아다니는 건물도, 하늘 위에 멈춘 파편들도 아닌, 수십 명을 거뜬히 넘는 인간의 존재였다.
서형우는 분명 이 도시에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를 떠올리다 그녀는 다른 사실을 하나 더 깨달았다. 그는 표적이 ‘사람들’을 살인자로 만든다고 말했다.
/ 2. 당신이 마주한 이야기
“저는 산성 사람들을 지키는 방패입니다. 윤서리 씨가 여기 들어온 이상 제 책임은 윤서리 씨를 죽지 않게 보호하는 것입니다. 윤서리 씨의 책임은 제 팔 안쪽에서 죽지 않는 것입니다. 부디 저보다 먼저 죽지 말아주세요.”
/ 3. 싱크섹션
“우리랑 같이 싸우는 모습 들키면 바깥에서 비원한테서 도망치고 살기 쉽지 않아요.”
“난 바깥이 아니라 여기서 살고 있는데?”
/ 5. 경선산성
“난 네 옆에 있어도 괜찮아. 너 같은 사람이 돼도 괜찮아.”
“애써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요.”
“그래. 거짓말이야. 앞으로도 계속 거짓말하면서 여기 있을게.”
/ 5. 경선산성
대체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가족애라고 하기엔 번민이 너무 컸고, 동지애라고 하기엔 헌신이 지나쳤습니다.
/ 5. 경선산성
“부탁해. 우릴 두고 떠나지 말아줘.” 끄트머리에 서 있던 남자가 울먹이며 말했다.
“저는…, 떠나지 않아요. 여기에 이렇게 있잖아요.”
“이미 다른 데로 떠난 것 같은 표정이잖아. 제발 우릴 놓지 마. 우린 네가 필요해.”
/ 6. 당신이 감내한 이야기
시간은 걸리더라도 어떻게든 좋은 결말을 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정여준은 거기에 집착하고 있는 거야.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사람도 그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데, 시간을 돌리는 복원자가 그 희망을 놓아서야 되겠어? 잘못되면 다시 시도하면 되잖아.
더 나은 방법을 찾아 길을 돌아가면 된다고.
/ 6. 당신이 감내한 이야기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가슴팍에 비벼진 머리카락이 뺨에 붙어 까슬까슬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있다가 다급하게 버둥댔다. 그녀의 머리와 어깨를 단단히 껴안은 누군가의 팔이 미동도 없다가 차음 느슨해졌다. 그녀는 포옹에서 벗어나 위를 보았다.
눈앞을 채운 건 최주상도, 봉화가 가득 떠오른 하늘 풍경도 아니었다.
소년처럼 배시시 웃는 정여준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를 껴안고 대신 온몸에 파편을 뒤집어쓴 그가 피를 토했다.
/ 6. 당신이 감내한 이야기
이번엔 어떨 것 같아?
내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언제쯤 성공할 거라고 생각해?
/ 6. 당신이 감내한 이야기
고정된 시간에 갇혀 그는 흘러가는 시간 속의 그녀를 관망해왔다. 그는 그녀에게 손을 대보았다. 모습이 선명히 보이고 조금 전까지 서형우와 대화하던 말까지 들렸지만, 그의 손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자신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물어보았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 7. 여기
이제 그녀는 명확한 표지판도 없이 과거로 이동했다. 정여준을 살려야 한다는 목적 외엔 모든 게 불분명했다. 무엇을 더 해야 할지 막막했다. 기계적으로 돌아온 과거의 공간에서 그녀는 무작정 정여준에게 도망치라고만 외치고 싶었다.
/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네가 뭘 했든 앞으로 뭘 하든 난 괜찮아. 너야말로 날 용서하려고 노력하지 말렴. 용서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온다면 용서하지 마.”
이미 그녀는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이 간절함으로 지나치게 번쩍이는 나머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순간 묵직한 깨달음이 그녀를 찾아왔다.
정여준의 마음이 지름길을 달리고 있었다.
/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자꾸 이 생각이 들어서 그러는데… 왜 이렇게 당신이, 익숙하고 그리운 거죠?”
제가 한 말에 본인이 더 놀랐는지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보였다. 민망해하는 그를 보고 그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또다. 그의 정신은 여전히 그녀가 알던 것보다 빨리 지름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가가 한 손으로 그의 눈을 덮었다. 뻣뻣하게 굳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맞대고 그녀가 말했다.
“왜냐면 당신은 날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난 당신이랑 백 년 가까이 같이 있었거든.”
손바닥 밑으로 그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있잖아, 방금 네가 한 말 모른 척하고 넘겨버린 게 지금까지 서른 네 번째인데…. 아무리 그래도 한 번은 정직하게 대답해주는 게 좋겠지? 내가 지금 시도하고 있는 뭔가가 계속 실패하는 중인데, 네가 시도한 그 질문도 자꾸 거절당하니까 보기에 별로 좋질 않네.”
그녀는 손을 떼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그래. 나도 당신이 그리워. 당신이랑은 다른 의미로 더 많이, 더 오래 그리워했어. 내가 아직도 만나지 못한 미래의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그녀는 과거 몇 번이고 했던 말에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난 네 옆에 있어도 괜찮아. 너 같은 사람이 돼도 괜찮아.”
/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뽀얗게 내리는 눈송이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그의 둥근 머리가 보였다. 손을 뻗으니 그는 배시시 웃었다. 그러더니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녀의 팔에 고개를 묻었다. 그녀는 절망에 가득 차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버석버석 마른 비명이 새 나왔다.
“이게 아니야. 네가 아니라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다고.”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그는 끝끝내 자신을 섹션의 사생아가 아닌 이경선의 후계자로 포장하길 택했다. 그렇게 살고 싶었고, 그 이름으로 죽고 싶었다.
그러니 어떻게 버리겠는가.
“난 네 옆에 있어도 괜찮아. 너 같은 사람이 돼도 괜찮아.”
그렇게 말해준 사람의 삶을, 미래를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그래, 우리 힘은 의지에 좌우되는 에너지야. 그게 무슨 뜼인지 이젠 정말 잘 알겠어. 이 능력은 의지를 가진 무언가를 건드리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난 죽음을 피하려 했던 사람은 어떻게든 살려냈는데, 죽을 각오를 했던 사람은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도 살릴 수가 없었어.” 그녀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왜 나정이는 자기가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까. 너는 왜 죽을 각오 따위를 했니. 네가 목숨을 던지지만 않았다면…, 네가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난… 그러면 내 능력은 널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몰라…. 아무도 꼭두각시가 되지 않고, 네가 날 구하려 하지 않고, 나도 널 구하려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구하지 않아도 네가 구해질 순 없을까….”
/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여자는 움찔하더니 그대로 그를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들짐승을 달래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위엔 우리 말고 없어. 난 복원자야. 우리 능력으론 서로를 다치게 할 수 없어. 그러니까 긴장하지 마.”
/ 9. 계단
죽어가는 얼굴보다는 차라리 이런 표정이 나았다.
그녀는 그에게 얼굴을 바짝 댔다. 코끝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 말 듯 했다.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우린 화해할 수 있어. 날 믿어. 부탁이야. 우린 화해할 수 있어. 그렇게 되도록 만들 거야. 비록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누군가는 죽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살 수도 있었던 친구가 죽는 일은 없을 거야. 믿어줘. 우린 반드시 화해할 거야.”
/ 9. 계단
처음으로 얻은 보상이었다. 그녀는 어서 정여준의 생존도 확신하고 싶어 자꾸만 발을 구르며 시계를 흘끔거렸다.
/ 9. 계단
윤서리가 목적에 실패해 시간을 돌릴 때마다 그 모든 순간의 정여준은 예외 없이 시간을 멈췄다. 고정된 시간은 하나씩 늘어가고, 윤서리와 정여준의 명령을 모두 따라야 했던 시공간은 매 순간 갈라져 분열했다. 과거가 반복되고 멈춘 시공간이 늘어감에 따라 그곳에 갇히게 되는 정여준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윤서리가 그를 살리는 데에 성공하고서야 외로운 반복도 끝을 맺었다. 최주상이 마주하고 있는 건 가장 처음으로 복제된 정여준이었다. 그의 뒤편, 수없이 겹쳐진 껍질 안쪽에는 무수한 정여준들이 자신을 제 공간에 가두고 다른 공간의 정여준을 인식하고 있었다. 멈춘 채 지속되는 한없는 시간을 감내하며,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기를 선택한 것이다.
/ 10.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그렇다고 하니 그러마 하겠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가영이… 윤서리를 저기 살려두고 왜 그렇게까지 견디는 거야?”
정여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최주상을 보았다. 그리고 먼 바깥에 환영처럼 스쳐 지나가는 윤서리의 모습을 보고,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겠어요?”
정여준은 미소 지었다.
최주상이 그를 완전히 처음 보는 낯선 이로 느낄 만큼 찬란한 미소였다.
“왜겠어요.”
/ 10.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흐느낌 사이로 돌림노래처럼 애국가가 불려지는 동안, 악절과 악절들이 부딪치며 생기는 미묘한 불협화음에 너는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하면 나라란 게 무엇인지 이해해낼 수 있을 것처럼.
/ 1장. 어린 새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 1장. 어린 새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 3장. 일곱개의 뺨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닫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 4장. 쇠와 피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 4장. 쇠와 피
허지만 죽은 다음의 세상을 나는 모른게. 거그서도 만나고 헤어지는지, 얼굴이 있고 목소리가 있는지, 반갑고 서러운 마음이 있는지 모른게. 느이 아부지 잃은 것을 가엾어해야 하는지, 부러워해야 하는지 어떻게 내가 알았겄냐.
그저 겨울이 지나간게 봄이 오드마는. 봄이 오먼 늘 그랬드키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먼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 겨우 숨을 쉬었다이. 그러다 겨울에는 삭신이 얼었다이.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다시 와도 땀이 안 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이.
/ 6장. 꽃 핀 쪽으로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를 위해서 살고 싶어요.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그랬던 것이 굉장히 후회스러워요. 손녀들이 서로 다른 문방구 간다고 싸우면 저는 둘 다 가요. 만날 양보하면 나이 들어서도 양보할까 봐. 옛날엔 양보하는 게 미덕이었지만 요새는 미덕 아니야. 나는 그게 싫더라고요.
/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들은 노동자였다.
결혼·출산·육아기의 여성들은 일터를 떠났지만 노동은 멈추지 않았다. 임정빈 한양대 명예교수의 연구를 보면 1980년 주부들의 가사노동 시간은 평일 평균 11.8시간, 휴일 평균 12.4시간이었다. 통계는 가사·육아를 생산 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경제활동 인구로 분류한다.
‘취업도 실업도 아닌 상태’를 의미하는 비경제활동인구의 다른 항목들은 통학·연로·심신장애·기타 등이다. 가사·육아 없이는 다른 경제활동이 불가능함에도, ‘집사람=집에서 노는 사람’이라는 편견이 노동의 가치를 폄하해온 것이다.
/ insight_1954년 32만 명의 딸들이 태어났다
늘 내 인생은 뭐였을까 생각하면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밖에 없지 않나 생각했는데요. 이렇게 얘기해보니까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구나 생각하게 되네요. 지금까지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내가 해온 일에 대해 물어봐줘서 고마워요.
/ 희자 씨를 담기에 집사람은 너무 작은 이름
글 쓰는 게 왜 재밌냐구요. 글쎄∼ 좋은 건 원래 왜 좋은지 모르잖아요. 그냥 그런 것 같아요. 죽어도 안 되던 것이 어느 날 될 때의 희열. 약간의 한계를 조금 넘었을 때의 마음.
/ 글 쓰는 사람, 인화정
인생의 많은 것이 얼마나 느닷없이 결정되는지 순자 씨는 안다.
/ 딸들에게 전하는 순자 씨의 진심
“엄마는 어떻게 맨정신으로 살 수 있었을까. 저는 제가 엄마보다 인내심이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가 아니라 애초에 엄마처럼 사는 일이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건 아닐까. 불안을 물려주지 않으려 나름의 방법으로 고군분투했을 나의 어른들. 옛날로 돌아가면 나를 숨 막히게 꼭 안던 엄마를 나도 함께 꼭 안아주고 싶어요.”
/ 딸들에게 전하는 순자 씨의 진심
“재밌게 살고, 힘들게 살지 마. 살아보니까 인생이… 그렇게 길지가 않아.”
/ 딸들에게 전하는 순자 씨의 진심
울 시간이 있어야 울지. 울어도 달래줄 사람이 있어야 울지. 너무 힘들어서 ‘나는 못 살겠다’하고 큰애를 업고 주문진 바닷가까지 나왔어요. 무작정 집을 나왔는데 이게 무슨 돈이 있어야지. 돈이 있어야 버스를 탈 거 아니래요. 하루 종일 바닷가에 앉아 있다가 할 수 없이 도로 걸어서 들어갔어요. 용감하지 않으면 울타리를 벗어나기 힘들어요.
/ 광월 씨가 10년째 부녀회장을 하는 이유
‘가만히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억울하다’는 말이 마음에 걸려 “병원에서 간병인 고용하려면 비싸요. 그런 대단한 일을 몇십 년 동안 해오신 것”이라고 하니 춘자 씨가 “잉 그러더만 ”이라고 입을 뗸 다음 기자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그랑께 아프지 말고 살어라.”
/ 나는 못 배웠응께 어른이 아니여
“제 느낌에 그 아이는 스킨십을 많이 해줘야 하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코로나 때문에 접촉에 한계가 있어서 제가 아이콘택트(눈맞춤)를 열심히 했어요.” 아이는 조금씩 안나 씨에게 다가왔다. “방학이 끝나고 두 달 만엔가 만났는데, 아이가 경청을 너무 잘하는 거예요. 어떤 한 행동을 보고 ‘너는 싹이 틀렸어’ 그럴 게 아닌 거죠. 아이들은 정말 금방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저도 배웠어요.”
안나 씨의 노동은 사랑이 되었다.
/ 안나 씨의 노동은 사랑이 되었다
나이에 갇히고 싶지도 않아요. 이제 오십대 중반이 넘어가는데 갑자기 육십이 됐다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못할까.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명함이) 필요하면서도 필요하지 않다고 했던 게 저는 제가 명함이에요. 제 자신이….
/ 나는 내가 명함이에요, 내 자신이
우리가 만난 여성들은 자신의 고된 노동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일을 이야기할 때 즐거워했다. “나 별로 한 거 없는데”, “나 특별한 사람 아닌데”라고 했던 이들이 인터뷰가 끝나고 난 뒤, “나 좀 멋있네”, “생각해보니까 나 일 좀 했네”라고 웃을 때마다 우리는 이미 이 기획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 epliogue
그 소소한 발견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생생한 흥분과 충격을 주었던지, 이십여 년 뒤 최초의 강렬한 기억을 묻는 심리치료사의 질문에 그녀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마당에 내리쬐던 햇빛이었다. 볕을 받아 따뜻해진 등과 목덜미. 작대기로 흙바닥에 적어간 문자들. 거기 아슬아슬하게 결합돼 있던 음운들의 경이로운 약속.
/ 2. 침묵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 2. 침묵
공포는 아직 희미했다. 고통은 침묵의 뱃속에서 뜨거운 회로를 드러내기 전에 망설이고 있었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 2. 침묵
우리는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허락된 것처럼.
/ 5. 목소리
그렇게 무사히 이곳의 하루하루가 흘러갑니다.
간혹 기억할 만한 일이 있었다 해도, 거대하고 불투명한 시간의 양감에 묻혀 흔적 없이 지워집니다.
/ 5. 목소리
그러니까, 어떤 감상과 낙관에도 빠지지 않은 채 나는 여기 있는 것입니다. 유난히 수줍어하는 수강생들과, 몇몇 스타 강사들을 기용해 용케 수익을 내며 인문학 아카데미를 꾸려가는 까다로운 성격의 원장과, 알레르기성 비염 때문에 사계절 휴지를 달고 사는 단발머리 아르바이트생과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이 생활의 덤덤한 즐거움입니다. 아침이면 그날 강독할 문장들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며 암기하고, 세면대 위의 거울 속에 어렴풋하게 비쳐 있는 내 얼굴을 곰곰이 바라보고, 마음이 내킬 때마다 환한 골목과 거리를 한가롭게 걷습니다. 문득 눈이 시어 눈물이 흐를 때가 있는데, 단순히 생리적이었던 눈물이 어째서인지 멈추지 않을 때면 조용히 차도를 등지고 서서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 5. 목소리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 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저 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대담하게 오류들을 내던지며 한 발 한 발 좁다란 평균대 위를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 묻고 답한 명철한 문장들의 그물 사이로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계속 묻고 답합니다.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 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 5. 목소리
하지만 조금도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번 다시 인생에서 겪을 수 없을 달콤한 밤들이었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귀신에 홀리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그 무렵 나는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기 전에 이미 당신의 얼굴은 내 눈꺼풀 안으로 들어와 있었습니다. 눈꺼풀을 열면 당신은 천장으로, 옷장으로, 창유리로, 거리로, 먼 하늘로 순식간에 자리를 옮겨 어른거렸습니다. 어떤 죽은 사람의 혼령이라도 그토록 집요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 5. 목소리
그곳은 이곳보다 일곱 시간 늦게 해가 뜨지요.
이제 멀지 않은 날에, 내가 정오의 태양 아래에 필름조각들을 꺼내들 때 당신은 새벽 다섯시의 어둠 속에 있겠지요. 당신 손등의 정맥을 닮은 검푸른 빛은 아직 하늘에서 다 새어나오지 않았겠지요. 당신의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고, 타오르며 글썽이던 두 눈은 눈꺼풀 아래에서 이따금 흔들리겠지요. 완전한 어둠 속으로 내가 걸어들어갈 때, 이 끈진길 고통 없이 당신을 기억해도 괜찮겠습니까.
/ 5. 목소리
말할 수 있었을 때, 그녀는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었다.
성대가 발달하지 않았거나 폐활량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싫어했다. 누구나 꼭 자신의 몸의 부피만큼 물리적인 공간을 점유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훨씬 넓게 퍼진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넓게 퍼트리고 싶지 않았다.
/ 7. 눈
말할 수 있었을 때, 이따금 그녀는 말하는 대신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말하려는 내용을 시선으로 완전하게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말 대신 눈으로 인사하고, 말 대신 눈으로 감사를 표하고, 말 대신 눈으로 미안해했다. 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 7. 눈
오래전에 끌어올랐던 증오는 끓어오른 채 그 자리에 멈춰 있었고, 오래전에 부풀어올랐던 고통은 부풀어오른 채 더이상 수포가 터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물지 않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 7. 눈
이상하다.
언젠가 꼭 이런 밤을 겪은 것 같다.
비슷한 수치와 당혹감을 느끼며 이 길을 걸었던 것 같다.
그때에는 그녀에게 말言이 있었으므로, 감정들은 더 분명하고 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몸속에는 말이 없다.
단어와 문장 들은 마치 혼령처럼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보이고 들릴 만큼만 가깝게 따라다닌다.
그 거리 덕분에, 충분히 강하지 않은 감정들은 마치 접착력이 약한 테이프 조각들처럼 이내 떨어져나간다.
그녀는 다만 바라본다. 바라보면서, 바라보는 어떤 것도 언어로 번역하지 않는다.
눈에는 계속해서 다른 사물들의 상象이 맺히고, 그녀가 걷는 속력에 따라 움직이며 지워진다. 지워지면서, 어떤 말로도 끝내 번역되지 않는다.
/ 7. 눈
세계는 환이고 산다는 건 꿈꾸는 것이다, 라고 그때 문득 중얼거려보았다.
그러나 피가 흐르고 눈물이 솟는다.
/ 8
어떤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그 사람은 물끄러미 나를 건너다보았어. 그때 내가 느낀 이상한 절망을 너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여자의 침묵에는 두려운 데가, 어딘가 지독한 데가 있었어. 오래전, 죽은 삐비의 몸을 하얀 가제수건에 싸려고 들어올렸을 때…… 우리가 얼어붙은 숟가락으로 파낸 작은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느꼈던 정적 같은.
상상할 수 있겠니.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침묵을 본 건 처음이었어.
/ 9. 어스름
집세가 싼 마인츠로 옮겨간 이듬해 겨울, 사춘기에 막 접어든 네가 나에게 했던 말이 있지. 아시아 사람들을 상대로 한 식료품점을 연 어머니가 늦도록 집을 비운 사이, 텅 빈 식탁 앞에서 지독히 맛없는 뮈슬리를 나눠 먹던 저녁에. 고개를 수그린 채 너는 중얼거렸어. 형편없는 악기인 네 육체와, 이제 곧 불러야 할 노래 사이의 정적이 벼랑처럼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빨갛게 언 손이 시리다고 말하는 여섯 살 여자아이의 얼굴로, 아무것도 알 수 없어졌다는 듯 너는 나를 우두머니 건너다보았지. 그때 생각했어. 네 목소리론 네 얼굴을 만져줄 수 없는 모양이구나. 그러면 무엇이 너를 만져줄까. 아마 나는 절망을 느꼈던 것 같아.
너도 나에게 그런 절망을 느꼈니.
내가 인천행 비행기표를 끊었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듣고, 너는 공연 리허설을 하루 앞드고 밤기차로 달려왔지. 한쪽 코트깃은 어깨 속으로 숨어들어가고, 찬 공기에 성대를 상하지 않으려고 흰색과 연두색, 연노란색 스카프를 여신처럼 겹겹이 감고서. 오빠를 이해할 수 없어, 라고 너는 말했지. 나는 오빠가, 우리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 9. 어스름
하지만 믿을 수 있겠니. 매일 밤 내가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는 걸.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 더듬더듬 커튼을 걷고, 유리창을 열고, 방충망 너머로 어두운 하늘을 봐야 하니까. 오직 상상 속에서 얇은 점퍼를 걸쳐입고 문 밖으로 걸어나갈 테니까. 캄캄한 보도블록들을 한 발 한 발 디디며 나아갈 테니까. 어둠의 피륙이 낱낱의 파스름한 실이 되어 내 몸을, 이 도시를 휘감는 광경을 볼 테니까. 안경을 닦아 쓰고,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짧은 파란 빛에 얼굴을 담글 테니까. 믿을 수 있겠니. 그 생각만으로 나는 가슴이 떨려.
/ 9. 어스름
그 스승이 나에게 충고했던 것이 아마도 옳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어. 문학 텍스트를 읽는 시간을 견딜 수 없었어. 감각과 이미지, 감정과 사유가 허술하게 서로서로의 손에 깍지를 낀 채 흔들리는 그 세계를, 결코 신뢰하고 싶지 않았어.
/ 14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 14
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을 찾기 위해 그는 눈을 감고 뺨으로 더듬는다. 선득한 입술에 그의 뺨이 닿는다. 오래전 요아힘의 방에서 보았던 태양의 사진이 그의 감은 눈꺼풀 속으로 타오른다.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의 표면에서 흑점들이 움직인다. 폭발하며 이동하는 섭씨 수천 도의 검은 점들. 그것들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아무리 두꺼운 필름조각으로 가린다 해도 홍채가 타버릴 것이다.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입맞춘다. 축축한 귀밑머리에, 눈썹에. 먼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그의 눈썹을 스쳤다 사라진다. 그의 차디찬 귓바퀴에, 눈가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흉터에 닿았다 사라진다. 소리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 20. 흑점
나는 사람을 먹었습니다. 이것이 죄가 됩니까?
낡고 깨진 공중전화부스가 아니라, 닳고 더러운 보도블록 틈새에 핀 잡초가 아니라, 부옇고 붉은 밤하늘이나 머나먼 곳의 십자가가 아니라, 너를 바라보다 죽고 싶었다. 너는 알까?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 모를까? 네가 모른다면 나는 너무 서럽다. 죽음보다 서럽다. 너를 보지 못하고 너를 생각하다 나는 죽었다. 너는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다. 내가 본 마지막 세상은 너여야 했다.
이모만을 사랑하던 나는 그날 이후 이모를 사랑하듯 구를 사랑했다. 내 사랑이 나뉘자 이모도 좋아하고 구도 좋아했다.
그 때 이모는 여름을 만들고 있었다.
여름을 만든다는 이모의 말만 기억날 뿐, 여름이 무엇이었는지는 까먹었다.
담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 담이와 보내는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 담이 하는 것은 나도 하고 싶었고, 담이 가는 곳에는 나도 가고 싶었다. 나쁘지도 올바르지도 않은 채로, 누가 누구보다 더 좋은 사람이다 그런 것 없이 같이 있고 싶었다.
언제나 담이 먼저 움직였다. 나를 오랫동안 곤란에 빠트리지 않았다.
구 대신 들어온 다른 것들이 터무니없이 옅고 가벼워서 구의 밀도를 대신하지 못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상대를 끝없이 기다린다는 뜻일까.
구가 죽어버린 지금도 나는 구를 기다리고 있다.
구도 나와 같을까.
그 시절, 내 손을 꼭 쥐고 나의 방향을 가늠해주던 구의 손과 팔. 그것을 뜯어먹으며 나는 절반쯤 미쳤다. 완전히 미치지는 않기 위해 나를 때리며 먹었다. 내 볼을, 눈을, 내 사지를 때렸다. 내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똑똑히 보기 위해서. 잊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다만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랑에 가장 가까운 감정. 우리 몸에도 마음에도 그것이 들러붙어 있었고 그것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이유가 필요했는데, 이유가 필요하다면, 그게 과연 사랑일까.
어느새 구와 나는 성인이었고, 우리 곁에는 완벽하게 아무도 없었다.
같이 살자.
내가 먼저 말했다.
나는 내가, 너를 좋아지게 하는 사람이면 좋겠어. 근데 그게 안 되잖아. 앞으로도 쭉 안 될 것 같잖아.
구의 목소리는 냉랭했지만 구의 눈동자는 버려진 아이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네가 있든 없든 나는 어차피 외롭고 불행해.
나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
다시 구를 기다리며 살 자신이 없었다.
만약에 너 때문에 내가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면 너는 술병을 치우는 대신 내 술잔에 술을 따라줘야 해. 우린 그렇게라도 같이 있어야 해.
이건 사랑이 아니야.
구가 말했다.
뭐든 상관없어.
희망 없는 세상에선 살 수 있었지만 너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가 않아서. 죽음은 너 없는 세상에고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어.
담아.
이 멍청아.
이젠 됐어. 넌 다 했어. 이 장례를 끝내야지. 끝내고 살아야지. 아주 오래 살아야지.
너도 여기 있고 나도 여기 있다. 네가 여기 있어야 나도 여기 있어.
밖을 봐. 네가 밖을 봐야 나도 밖을 본다.
네가 살아야 나도 살아.
담아.
이 바보야.
시간은 상대적이라던데, 이승의 백 년이 저승에서는 열흘 정도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서 열흘만 기다리면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언니와 밤새 술을 마신 후 걷던 밤의 거리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리의 밤을 기억하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습기였다. 세 달 남짓한 여름밤을 제외하면 거의 언제나 곧이라도 빗방울을 떨어뜨릴 것만 같은 대기가 얇고 부드러운 껍질처럼 우리를 감쌌고, 나는 그 안에서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꼈다. 골목들은 가로등의 따뜻한 불빛에 덮여 있었고, 도시의 오래된 건물들은 나에게 영원을 떠올리게 했다.
/ 시간의 궤적
고작 오 년 사흘을 함께 보냈을 뿐인 우리는 서로와의 재회에서 무슨 기적을 바랐던 것일까요? 우리가 감당하며 살아갈 미래를 생각하면 오 년도 사흘도 허망하기는 매한가지인 시간일 뿐인데요.
/ 여름의 빌라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그 순간, 그들의 삶의 각도가 미세하게 어긋났지만 남편은 아무것도 알아챌 수 없었으므로 그저 첫째 아이가 내미는 컵을 받아 쥐었다. 한순간이지만 엄마가 자신을 완벽히 잊을 수 있음을 알아버려 한나절 만에 조숙해진 둘째 아이만이 엄마의 평상시와는 다른 아름다움이 낯설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생각해보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여자’라는 일면 무해해 보이는 표현 속에 감춰져 있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나는 거슬렸던 것 같다. 할머니가 다른 자매들과 달리 대학에 입학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되지만, 그토록 원해 진학한 대학을 전쟁이 터지기도 전에 중퇴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그다지 기억되지 않는다.
/ 흑설탕 캔디
하지만 꿈속에서 할머니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안 돼.” 그리고 할머니는 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다. 조금은 고통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조금도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주먹을 더 꼭 쥔 채. “이건 내 것이란다.”
/ 흑설탕 캔디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나무가 움직였다. 새인가 하고 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 아주 잠깐 동안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 나는 당신이 안온한 혐오의 세계에 안주하고픈 유혹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사랑 쪽으로 나아가고자 분투하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나는 이 여름, 그런 당신의 분투에 나의 소설들이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줄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다.
/ 작가의 말
내가 평소에 뉴스를 소비하는 방식이 공포를 유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장 너무 빠른 속도, 너무 잦은 멀티태스킹: 집중력은 한정된 자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노출되는 정보량의 엄청난 팽창과 정보가 들이닥치는 속도를 아무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착각이다. "점점 진이 빠지게 됩니다." 수네가 말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든 차원에서 깊이를 희생하고 있다는 겁니다… 깊이는 시간을 요구합니다. 깊이는 사색을 요구해요. 모든 것을 다 따라잡아야 하고 늘 이메일을 보내야 한다면 깊이를 가질 시간이 없어져요. 관계에서의 깊이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에너지가 필요해요.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하죠. 거기에 전념해야 해요. 주의력도 필요하고요. 깊이를 요구하는 모든 것이 악화되고 있어요. 그게 우리를 점점 더 표면 위로 끌어올리고 있고요.
/ 쏟아지는 정보, 짧아지는 집중 기간
"보통 우리는 쉬운 길로 가고 싶어 해요. 하지만 우리가 행복할 때는 약간 어려운 일을 할 때거든요. 핸드폰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늘 중요한 것보다는 쉬운 것을 제안하는 물건을 언제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게 된 거예요." 수네가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나 자신에게 더 어려운 것을 선택할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 쏟아지는 정보, 짧아지는 집중 기간
오늘날의 평균적인 사무직 노동자는 근무시간의 40퍼센트를 자신이 '멀티태스킹'을 한다고 믿으며 보낸다. 즉 이들은 자기 집중력에서 이 모든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 멀티태스킹의 함정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기계의 논리에 따라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이며, 기계와 다르게 작동한다.
/ 멀티태스킹의 함정
수년간 나는 가늘고 끝질긴 인터넷의 신호에서 삶의 큰 의미를 얻었다. 이제 그 신호들은 사라지고 없었고, 그것들이 사실상 얼마나 보잘것없고 부족한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신호들이 그리웠다.
/ 2장 몰입의 손상: 스키너의 비둘기와 미하이의 화가, 무엇이 되고 싶은가
"좋은 삶을 살려면, 안 좋은 요소를 없애는 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긍정적인 목표도 필요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계속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 인생의 끝에서 무엇을 돌아보게 될까
언젠가 거짓이 거의 분명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말년의 몇 년간 엘비스의 담당의가 정맥에 직접 카페인을 주사하는 방식으로 엘비스를 깨웠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끔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해줄 내 담당의는 여태 어디에 있는 거야?
/ 잠들지 않고 깨어 있을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
아네의 연구는 사람들이 화면으로 글을 읽을 때 "대충 훑어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는 정보를 재빨리 훑어서 필요한 내용을 뽑아내려 한다.
/ 화면의 열세
말할 가치가 있는 내용 중 280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드물다. 어떤 생각에 대한 나의 반응이 즉각적일 때, 내가 그 주제에 대해 수년간 전문 지식을 쌓아온 사람이 아니라면 그 반응은 얄팍하고 별 볼 일 없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이 즉시 나에게 동의하느냐 아니냐는 내가 하는 말이 옳은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아니다. 그건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문제다. 현실은 트위터와 정반대인 메시지를 택해야만 분별력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은 복잡하며,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이해 가능하다. 세상은 천천히 사고하고 파악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진실은 처음에는 인기를 얻지 못한다.
/ 우리가 소셜미디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 중 다수가 곧 공감 능력의 발전이었다. 다른 인종 집단도 자신들처럼 감정과 능력, 꿈이 있다는, 적어도 일부 백인의 깨달음. 그동안 자신들이 여성에게 행사한 권력이 불합리하고 심각한 고통을 낳는다는 일부 남성의 깨달음. 동성애가 이성애와 다르지 않다는 많은 이성애자의 깨달음. 공감은 발전을 가능케 하고, 인간적인 공감의 폭을 넓힐 때마다 우리는 우주를 조금씩 더 열어젖히게 된다.
/ 소설 읽기의 장기적 효과
"우리는 모두 파국적 종말로 향하고 있는 물과 진흙으로 된 행성에 살고 있잖아요. 이 문제들은 혼자서 해결할 수 없어요." 그가 말했다. "이게 제가 공감 능력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예요."
/ 소설 읽기의 장기적 효과
"밤 12시까지 일 말고도 할 게 무척 많답니다… 일 밖에서의 삶이 있어야 해요."
/ 이게 된다고요?
우리가 일하는 방식은 확고해서 바꿀 수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방식은 바뀔 수 있고, 그때가 되면 우리는 애초에 꼭 그럴 필요가 없었음을 깨닫게 된다.
/ 이게 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