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병의 본질’이라든가 ‘새로운 병’이란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의사는 자연학자와는 달리 다양한 생명체들이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을 이론화하는 것보다, 단 하나의 생명체, 역경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개체, 즉 주체성을 지닌 한 인간에 마음을 둔다.
/ 1부, 상실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통일성과 이성과 감정 심지어는 우리의 행동까지도 기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내가 기다리는 것은 완전한 기억상실뿐이다. 그것만이 내 삶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다.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ㅡ루이스 부뉴엘
/ 길 잃은 뱃사람
만약 기억의 대부분을 잃어버린다면, 그래서 자신의 과거를 잃어버리고 현재 자신이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그 사람에게는 어떤 삶(만약 그런 게 있다면), 어떤 세계, 어떤 자아가 남게 될 것인가?
/ 길 잃은 뱃사람
이 가엾은 남자가 누구이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지 등의 문제를 여러모로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이처럼 기억이 끊겨서 연속성을 잃어버린 존재를 과연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 길 잃은 뱃사람
자기 몸을 통제하고 움직이는 것만큼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 우리에게 또 있을까? 그러나 그런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데다 아주 익숙한 일이기 때문에 정작 우리는 그것에 대해 관심도 갖지 않는다.
조너선 밀러는 훌륭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인체의 신비〉를 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 몸의 신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몸에 대해 결코 의심을 갖지 않는다. 우리 몸은 그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누구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우리 몸의 이런 확실성이야말로 모든 지식과 확실성의 출발점이자 기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마지막 책 《확실성에 대해서》의 서두를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했다. “여기에 하나의 손이 있다는 것을 당신이 알고 있다면 당신이 어떤 주장을 하든지 모두 인정하겠다.” 그러나 곧바로 그는 책의 같은 쪽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것을 의심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그것 자체가 의문이다.” 조금 뒤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의심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이것을 의심할 근거가 없다!”
/ 몸이 없는 크리스티너
그녀는 장애인이지만 그것이 겉으로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는 시각장애인도 아니고 신체가 마비되지도 않았다. 겉으로 나타나는 장애는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종종 거짓말쟁이나 얼간이로 취급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숨은 감각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같은 취급을 받는다.
/ 몸이 없는 크리스티너
“행동이야말로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괴테는 말했다. 윤리적이거나 실존적인 딜레마에 빠졌을 때는 이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작과 지각이 딜레마의 근원을 이룰 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이 경우에도 뜻하지 않은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단 하나라도 좋으니 무언가 돌파구를 얻기만 한다면(단 하나의 동작이라도 좋고, 지각이라도 좋고, 충동이라도 좋고, 최초의 한마디라도 좋다. 헬렌 켈러에게 ‘물’이라는 단 한마디가 그런 역할을 했듯이 말이다) ‘무’였던 세계가 ‘전부’로 뒤바뀔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충동이야말로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충동이야말로 행동이나 반사운동보다 그 존재가 훨씬 명백하며 또한 좀더 신비적이다. 우리는 매들린을 향해서 “이것을 하세요.”하고 말할 수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충동에 기대를 거는 것뿐이었다. 충동에 희망을 걸고 충동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충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이었다.
/ 매들린의 손
왜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걸까? 그 까닭은 자연스러운 발화는 단어만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휴링스 잭슨이 생각했듯이 주제(말하려고 하는 내용)만으로 성립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발화는 입에서 나오는 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모든 존재와 의미를 담고 있는 음이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단어만을 알아서는 불충분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어상실증 환자가 전혀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는다 해도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닌 것이다. 단어와 문법구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가만히 들어보면 말에는 반드시 나름대로의 말투가 있다. 또한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면 그 얼굴에는 말을 능가하는 힘을 가진 표정이 있다. 이 표정은 대단히 깊이 있고 다양하며, 복잡 미묘하다.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상실증 환자들이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이 표정이다. 언어상실증 환자들의 경우, 때때로 말하는 사람의 표정을 이해하는 힘을 잃기는 커녕 보통 사람보다 오히려 더욱 뛰어난 힘을 갖기조차 한다.
/ 대통령의 연설
‘몸 상태가 좋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불만스러울 아무런 이유가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한시 누리고자 한다. 불만 상태와는 아주 정반대의 대척점인 것이다. 기분이 나쁘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불평을 토로한다. 그러나 경우에 다라서는 엘리엇처럼 지금 까지의 지식과 연상, 혹은 도를 넘은 상태로부터 막연하게 무언가 ‘이상한’ 것을 감지해내는 일이 있다. 이렇게 해서 환자는 ‘몸 상태가 좋은’ 것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지만 ‘몸 상태가 지나치게 좋은’ 것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감정을 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깨어남》의 핵심적이고 잔혹한 주제이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떤 깊은 곳에 결함이 있어 몇십 년이나 지독하게 고생한 환자가 기적처럼 갑자기 좋아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변덕스럽고 위험한 ‘과잉’의 상태로 이행했을 뿐인 것이다.
/ 2부 과잉
‘위험하리만치 좋은 몸 상태’와 ‘병적인 특출함’. 그것은 기만적인 행복감이다. 그 밑에는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다. 그것은 과잉이 놓은 무시무시한 함정이다. 그것은 자연이 놓은 함정일 수도 있고, 우리 자신이 놓은 함정일 수도 있다. 전자는 도취로 인한 일종의 이상 증세로 나타나고, 후자는 흥분에 대한 광적인 탐닉으로 나타난다.
/ 2부 과잉
중독이나 병에 의해 해방과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정신과 상상력은 무뎌진 상태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 그 얼마나 역설적이고 잔인하며 아이러니한 일인가!
/ 큐피트 병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묘한 세상과 접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통상적인 상식이 뒤집히는 세계이다. 병리 상태가 곧 행복한 상태이며, 정상 상태가 곧 병리 상태일 수도 있는 세계이자, 흥분 상태가 속박인 동시에 해방일 수도 있는 세계.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몽롱하게 취해 있는 상태 속에 진실이 존재하는 세계 말이다.
/ 큐피트 병
우리는 각자 오늘날까지의 역사, 다시 말해서 과거라는 것을 지니고 잇으며 연속하는 ‘역사’와 ‘과거’가 각 개인의 인생을 이룬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인생 이야기, 내면적인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와 같은 이야기에는 연속성과 의미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인생이기도 하다. 그런 이야기야말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기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전기傳記이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우리 자신에 의해, 우리 자신을 통해, 우리들 안에서 즉 지각·감각·사고·행동을 통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무의식중에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물론 입으로 말하는 이야기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생물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우리는 서로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로서 우리 모두는 각각 고유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필요하다면 되살려서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즉 지금까지의 이야기인 내면의 드라마를 재수집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 편의 이야기 즉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 정체성의 문제
흄의 생각대로라면 개인의 정체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각 혹은 지각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말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의 지각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인간은 그저 계속해서 변화하기만 하는 감각의 집합체가 아니라 지속적인 개체 혹은 자아에 의해 통일을 유지하는 확고한 존재이다. 그러나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처럼 줄안정한 존재의 경우에는 흄의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분명히 그들의 생활은 어느 정도 왔다 갔다 하는 발작적인 지각과 움직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 투렛 증후군에 사로잡힌 여자
사물을 생각하거나 논하는 경우에는 항상 두 가지 영역이 있다. 그 두 가지 영역을 뭐라고 불러도 좋겠지만 ‘물리적인’ 영역과 ‘현상적인’ 영역으로 나누는 것도 하나의 좋은 예이다. 요컨대 양과 형식을 문제삼는 영역과 사물의 질을 다루는 영역이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기 고유의 정신세계, 마음의 여로 혹은 심상풍경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 대개는 그것들 하나하나에 대해서 신경학적인 상관관계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생리학적인 것이나 신경학적인 것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도 인간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런 때에 생리학 혹은 신경학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거나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까지야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쓸데없는 일로 여겨지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며 무언가에 의해 규제된다. 그러나 우리는 신경기능과 신경계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복잡한,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사고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라고 여긴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사고는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때때로 기질적인 병의 개입으로 변화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 3부 이행
도상적으로 종합되지 않은 경험은 경험이라고 말할 수 없다. 도상적으로 종합되지 않은 행위 역시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뇌에 새겨진 모든 사물에 대한 기록’은 도상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뇌에 새겨진 기록의 최종적인 형태이다. 설령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 중 예비 단계에서 산정적이고 프로그램적인 형태를 취하더라도 말이다. 뇌에서 표현의 최종적인 형태는 ‘예술’이다. 혹은 이것을 예술의 용인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다. 즉 인간의 경험과 행위는 장면과 선율이 되어 표현되는 것이다.
/ 회상
키에르케고르만큼 이것을 아름답게 표현한 사람은 없다. 그는 임종을 눈앞에 두고 이렇게 썼다. “너, 평범하고 소박한 인간이여.” 이 말을 조금 바꿔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성경의 상징주의는 끝없이 높은 곳에 있다. (…) 그러나 그것은 지능이 높고 낮음과 관계가 없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적인 차이와도 관계가 없다. (…) 만인은 이 점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그 끝없는 높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4부 단순함의 세계
우리는 환자의 결함에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는, 상실되지 않고 남아 있는 능력을 거의 간과했다. 내게 이 점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준 사람이 리베카였다. 우리는 소위 ‘결함 연구’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여서 ‘내러톨로지’(서사학)쪽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내러톨로지’야말로 지금까지 무시되었지만 반드시 필요한 ‘구체성의 과학’인 것이다.
/ 시인 리베카
리처드 월하임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실존적인 자아와는 관계가 없는 단순한 ‘비중추성’ 기억에 불과했다. 뉴욕의 지도에 감정이 없듯이 그러한 기억에는 거의 아니 전혀 아무런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맥락이 없고 발전성도 없으며 응용될 수도 없다. 따라서 상궤를 벗어난 그의 직관적 기억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그 자체로는 완결된 세계가 될 수 없었다. 통일되지도 않고 감정도 들어 있지 않으며 그 자신과도 아무련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리학적인 것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즉 기억의 핵 혹은 기억의 은행과도 같은 것이지, 살아 있는 인격의 일부는 아니었다.
/ 살아있는 사전
분명히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저자가 말한 대로 ‘기적’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모은 것이다. 뇌신경에 무언가 이상이 일어나면 기묘하고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고, 그로 인해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동작과 상태가 나타난다. 이 책에 실린 24편의 이야기는 모두 그러한 예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사례들을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본다거나 흥미 본위로 읽는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며, 저자의 의도나 진심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병마의 도전을 받아 정상적인 기능을 상실하고 일상생활을 단념해야 하는 환자들은 그 나름대로 병마와 싸우며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비록 이길 수 없는 싸움이고 뇌의 기능은 정상으로 되돌아올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인간이라는 사실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색스가 거듭 주장하려는 것이며,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혼’은 과학적인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그는 이 단어를 사용하는 데 약간 주저하면서 되도록 많이 사용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이 있음을 그는 믿고 있다. 우리는 24편의 이야기 가운데 어느 것을 읽어도 그런 환자에 대한 애정이 가슴 찡하게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도 ‘영혼’이라는 개념을 굳게 신뢰하는 그의 신념과 같은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가 병 자체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렇게 진한 감동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병보다는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적인 의사이기 때문에 이 책과 같은 걸작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역자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