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싸를 죽여라, 앤절라 네이글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그것은 다만 인터넷 발 풍자로 둔갑한, 유구한 역사의 인종차별주의와 같은 무언가는 아니었을까? 정말 그것이 진보적 인터넷문화의 무의미한 히스테리와 유사 정치에 대한 영리한 패러디였을까? 그러한 밈을 만들어내고 퍼뜨린 사람들은 애초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그들 자신이 [밈을 통해 무언가를] 비꼬는 건지 아닌지 기억은 하고 있을까? 그들이 미디어 현상의 아이러니를 추구하는 패러리스트인 동시에 진지한 행위자라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 들어가며: 온라인 극우의 부상,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인터넷 어느 깊숙한 곳이 아니라 대중 미디어에서 먼저 접하면 일반인들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기괴한 하위문화적 행위들, 새로운 정체성, 기이한 사건들은 모두 어떤 반응에 대한 반응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각각의 반응은 다른 반응에 분노하며 나타난 또 다른 반응인 것이다.

/ 들어가며: 온라인 극우의 부상,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늘날 온라인 좌우 진영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현상은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이 기이한 극단적 엄숙주의 시기의 산물이다. 이러한 온라인 정치의 시작이 언제부터인지는 모호하지만 이는 특정 시기의 한 세대를 지배했고, 주류의 감성과 언어에도 영향을 미쳤다.

/ 들어가며: 온라인 극우의 부상,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분별없는 자유주의적 취소의 외침은 마일로 이아노풀로스 같은 카리스마를 소유한 인물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반PC와 상스러운 조롱으로 점철된 온라인 백래시의 온상이 되었다. 지난 몇 년간 유사 연애 감정을 선사하는 팝스타에서 쥐스탱 트뤼도까지 누구랄 것 없이 ‘백인우월주의자’라고 부르고 ‘위드허’를 천명하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성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식으로 늑대가 나타났다며 외쳐댄 끝에, 진짜 늑대가 나타났다.

/ 들어가며: 온라인 극우의 부상,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지금의 이른바 대안우파가 주류 세력이나 새로운 청년 세대와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이해하기도 어려운 논문 형식의 블로그 글들이 아니었다. 대안우파에 특유의 젊은 에너지와 해커의 전술을 제공한 건 이미지와 유머에 근간을 두는 포챈 그리고 나중에는 에잇챈이 된 저속한 밈 공장이었다.

/ 리더 없는 디지털 혁명의 역설


논자들은 2010년대 초 인터넷을 중심으로 일어난 시위의 새로운 물결이 지닌 초당파성을 상찬했지만, 리더 없는 수평적 인터넷 중심 정치학의 무근본성은 더 이상 무턱대고 찬양할 게 아닌 것으로 보인다.

/ 리더 없는 디지털 혁명의 역설


허무주의적이고 뭐든지 비꼬는 챈문화가 더 넓은 범위의 대안우파적 감성으로 확장된 것은 정치적 올바름, 페미니즘, 다문화주의 등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의제들이 자유로운 삶과 테크놀로지를 영위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믿는다.

/ 리더 없는 디지털 혁명의 역설


새로운 온라인 우파를 이해하려면 정통 우파에서 공통점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1968년 좌파의 슬로건인 ‘금지를 금지하라’와 접점을 찾는 편이 유의미할 것이다.

/ 위반의 온라인 정치학


이 서사에서 이아노풀로스를 위시한 온라인 트럼프주의 트롤 우파는 1960년대와 1990년대에 차례대로 있었던 문화전쟁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또 다른 위대한 전환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된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인터넷 하위문화를 영위하는 젊고 ‘쿨’한 이들이 주도자들이라는 것이다.

/ 뷰캐넌에서 이아노풀로스까지, 보수주의자들의 문화전쟁


언어 사용에서 사회적 의례 및 정치적 올바름의 억제로부터 자유로워진 이드의 광란으로서, 온라인 세계의 정서는 전반적으로 성경 공부보다는 입에 걸레를 문 듯한 악성 댓글의 정신에 가깝고 전통적 가족의 가치보다 <파이트 클럽>을, 에드먼드 버크보다 사드 후작의 정신을 따른다.

/ 뷰캐넌에서 이아노풀로스까지, 보수주의자들의 문화전쟁


마르크스의 공식에서 자본주의는 궁극적으로 궁핍화를 가져오며 이에 따라 도시 산업 노동계급은 혁명적 계급이 될 운명이다. 그러나 마르쿠제에 따르면, 부유한 사회에서는 역사적으로 근대 세계의 양대 혁명적 계급이었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더 이상 역사적 변혁의 주체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마르쿠제를 비롯해 그의 관점을 공유하는 이들이 보기에 노동계급은 혁명적이기를 멈추고 점차 반동적이며 문화적 보수가 되어갔다. 반면에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정체성 운동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급진화되고 있었다.

/ 뷰캐넌에서 이아노풀로스까지, 보수주의자들의 문화전쟁


이아노풀로스, 트럼프, 대안우파의 부상은 보수주의의 귀환을 알리는 현상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비순응주의, 자기표현, 위반을 위한 위반과 반권위주의 그 자체(좌우를 불문하고 이드와 개인의 해방 이외에는 그 무엇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딱 맞는 감성)로 점철된 문화가 절대적 헤게모니를 차지했다는 증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원칙적 반문화의 사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다만 신우파의 양식이 되었다.

/ 뷰캐넌에서 이아노풀로스까지, 보수주의자들의 문화전쟁


상징적 재현의 다양성과 이에 대한 인정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었고,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나의 정체성을 지워버렸다’고 꾸짖었으며 [당신이] 백인·이성애자·남성·시스젠더라면 그저 ‘듣고’ ‘믿으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 뷰캐넌에서 이아노풀로스까지, 보수주의자들의 문화전쟁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우파는 온갖 문제적 발언으로 더욱 폭주하는 반면, 좌파는 당혹스러워하거나 방어적이거나 변명을 하고 어떤 경우는 [좌파로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모습까지 보였다는 것이다.

/ 뷰캐넌에서 이아노풀로스까지, 보수주의자들의 문화전쟁


남초 커뮤니티와 대안우파의 교류가 활발해진 지금 상황에서 어떤 커뮤니티든 저러한 사고방식에 노출되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확실한 것은 위계질서의 피라미드에서 낮은 위치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그들의 분노가 종종 매우 극단적인 방식으로 폭발한다는 것이다.

/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와 대안우파의 연결고리


정치적 올바름으로 보통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낀다는 주장은 우파의 레토릭에서 드물지 않은 것이었지만 우파는 마치 자신들이 애초부터 토머스 프랭크와 같은 논조를 개진해왔다는 듯, 하위문화적 엘리트주의에 머물러 있었던 논지를 노동계급의 고결함 혹은 약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마저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급격히 전환했다. 그러나 실제로 우파의 논지는 언제나 혐오와 경제적 엘리트주의에 기반한 위계질서와 불평등을 옹호하는 주장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 하위문화적 구별짓기와 ‘반항적 남성성’이라는 환상


반문화적 위반이라는 것은 지극히 공허하고 기만적인 개념이다. 이는 주류의 가치와 취향을 무시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공백을 만든다. 모든 끔찍한 것들 앞에 취약해져버린 문화를 진보파가 저항 헤게모니적 힘으로 낭만화하게 만든 것도 바로 이 공백이었다.

/ 하위문화적 구별짓기와 ‘반항적 남성성’이라는 환상


손턴은 문화자본이 세련되고 정중한 예의를 갖춤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위문화자본은 ‘뭘 좀 아는 것’, 즉 소수만 쓰는 은어 및 하위문화 특유의 요소들을 이용함으로써 스스로를 주류 문화와 대중사회로부터 구별지을 줄 알아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하위문화적 구별짓기와 ‘반항적 남성성’이라는 환상


파시스트들은 이제 자신들이 신랄하고 반문화적이고 위반적이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놓는 지경까지 왔다. 이쯤되면 우리는 진부하고 낡아빠진 반문화적 이상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심각하게 고찰해야 하지 않을까.

/ 하위문화적 구별짓기와 ‘반항적 남성성’이라는 환상


마찬가지로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1960년대 서구 대중문화를 지배해왔던 미학적 가치들, 즉 위반, 전복, 반무화 같은 것들이 오늘날 온라인 극우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 하위문화적 구별짓기와 ‘반항적 남성성’이라는 환상


먼저 인터넷문화에서 쓰이는 ‘아싸’의 범위가 제대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을 언급해야겠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아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여기에는 내향형이라는 개인의 기질적 측면과 관계 맺기의 실패라는 사회적 소통의 측면이라는 두 가지 ‘아싸’가 뒤엉켜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옮긴이의 말


인터넷 커뮤니티에 포진해 있는 이들이 서로 막말과 폭언을 주고받고 때로 의기투합하여 여성을 공격하고, ‘맘충’과 ‘잼민이’(어린이를 가리키는 멸칭 신조어)를 운운하고 유명인들을 인신공격하며 그것으로 타인과의 소통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빼앗긴 이름으로서의 ‘아싸’에 대한 분노에 동참하는 이들은 인싸를 향한 원한과 혐오를 키워가면서 자신들의 사회성 결여, 나아가 반사회성을 합리화한다.

/ 옮긴이의 말


어떤 텍스트를 가지고 자기들 마음대로 유희하며 원저작자의 의도나 맥락과는 완벽히 무관하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언어유희를 활용한 신조어와 은어들로 공론장의 언어는 물론 일상의 언어까지 극우적 메세지로 오염시키는 것은 한편으로 상황주의 전략들을 연상케 한다.

/ 옮긴이의 말


‘권위에 저항해야 한다’는 당위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채로 전복과 위반이라는 가치를 무분별하게 상찬해왔던 끝에, 권위가 해체된 뒤 생긴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옮긴이의 말


저항·전복·위반 등에 대한 무분별한 옹호는 네이글이 지적하듯 ‘악마와의 거래’이며, 그의 말처럼 ‘트롤들을 트롤링’하는 건 비생산적이다. 우리는 분명 그 부작용을 목격했다.

/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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