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 안 가?” 남자가 말했다.
차라리 이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이 남자를 죽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여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시간의 타래가 감길 때마다 그 생각은 퇴색되었다가 덧칠되고, 희미해졌다가 견고해지길 수없이 반복하는 변덕을 부리게 되지만.
“도망가 줘.”
/ 1. 당신이 시작한 이야기
따가운 폭발음이 터지기 직전에 여자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도망쳐.”
/ 1. 당신이 시작한 이야기
여자가 그랬듯, 여준 역시 차라리 이때 복잡하게 굴 것 없이 바로 그녀를 죽였다면 좋았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오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이야기다.
/ 1. 당신이 시작한 이야기
대재난 때문에 사람들이 특별히 잔인하게 변모한 건 아니었다. 그저 4만 명 넘는 유령의 무게를 감내하고 걷기엔 삶이 너무 험준한 탓이었다.
/ 2. 당신이 마주한 이야기
수풀과 초목 근처를 지나갈 때면 동물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다람쥐와 까치가 떼를 지어있었고 간혹 제법 큰 고라니도 지나갔다. 그들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구렁이가 4차선 도로를 건너는 걸 숨죽이고 쳐다보다가, 막상 눈앞에서 동물이 사라지면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와서는 안 될 곳에 함부로 침입한 기분이었다. 바람 소리만 가득한 유령도시에선 발소리를 내는 것마저 불경하게 들렸다.
/ 2. 당신이 마주한 이야기
턱을 치고 올라오는 호흡을 견디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옆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었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있었다. 도시에 들어와서 본 것 중 그녀에게 가장 충격을 준 건 4차선 위의 구렁이도, 포탄처럼 날아다니는 건물도, 하늘 위에 멈춘 파편들도 아닌, 수십 명을 거뜬히 넘는 인간의 존재였다.
서형우는 분명 이 도시에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를 떠올리다 그녀는 다른 사실을 하나 더 깨달았다. 그는 표적이 ‘사람들’을 살인자로 만든다고 말했다.
/ 2. 당신이 마주한 이야기
“저는 산성 사람들을 지키는 방패입니다. 윤서리 씨가 여기 들어온 이상 제 책임은 윤서리 씨를 죽지 않게 보호하는 것입니다. 윤서리 씨의 책임은 제 팔 안쪽에서 죽지 않는 것입니다. 부디 저보다 먼저 죽지 말아주세요.”
/ 3. 싱크섹션
“우리랑 같이 싸우는 모습 들키면 바깥에서 비원한테서 도망치고 살기 쉽지 않아요.”
“난 바깥이 아니라 여기서 살고 있는데?”
/ 5. 경선산성
“난 네 옆에 있어도 괜찮아. 너 같은 사람이 돼도 괜찮아.”
“애써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요.”
“그래. 거짓말이야. 앞으로도 계속 거짓말하면서 여기 있을게.”
/ 5. 경선산성
대체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가족애라고 하기엔 번민이 너무 컸고, 동지애라고 하기엔 헌신이 지나쳤습니다.
/ 5. 경선산성
“부탁해. 우릴 두고 떠나지 말아줘.” 끄트머리에 서 있던 남자가 울먹이며 말했다.
“저는…, 떠나지 않아요. 여기에 이렇게 있잖아요.”
“이미 다른 데로 떠난 것 같은 표정이잖아. 제발 우릴 놓지 마. 우린 네가 필요해.”
/ 6. 당신이 감내한 이야기
시간은 걸리더라도 어떻게든 좋은 결말을 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정여준은 거기에 집착하고 있는 거야.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사람도 그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데, 시간을 돌리는 복원자가 그 희망을 놓아서야 되겠어? 잘못되면 다시 시도하면 되잖아.
더 나은 방법을 찾아 길을 돌아가면 된다고.
/ 6. 당신이 감내한 이야기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가슴팍에 비벼진 머리카락이 뺨에 붙어 까슬까슬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있다가 다급하게 버둥댔다. 그녀의 머리와 어깨를 단단히 껴안은 누군가의 팔이 미동도 없다가 차음 느슨해졌다. 그녀는 포옹에서 벗어나 위를 보았다.
눈앞을 채운 건 최주상도, 봉화가 가득 떠오른 하늘 풍경도 아니었다.
소년처럼 배시시 웃는 정여준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를 껴안고 대신 온몸에 파편을 뒤집어쓴 그가 피를 토했다.
/ 6. 당신이 감내한 이야기
이번엔 어떨 것 같아?
내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언제쯤 성공할 거라고 생각해?
/ 6. 당신이 감내한 이야기
고정된 시간에 갇혀 그는 흘러가는 시간 속의 그녀를 관망해왔다. 그는 그녀에게 손을 대보았다. 모습이 선명히 보이고 조금 전까지 서형우와 대화하던 말까지 들렸지만, 그의 손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자신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물어보았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 7. 여기
이제 그녀는 명확한 표지판도 없이 과거로 이동했다. 정여준을 살려야 한다는 목적 외엔 모든 게 불분명했다. 무엇을 더 해야 할지 막막했다. 기계적으로 돌아온 과거의 공간에서 그녀는 무작정 정여준에게 도망치라고만 외치고 싶었다.
/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네가 뭘 했든 앞으로 뭘 하든 난 괜찮아. 너야말로 날 용서하려고 노력하지 말렴. 용서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온다면 용서하지 마.”
이미 그녀는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이 간절함으로 지나치게 번쩍이는 나머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순간 묵직한 깨달음이 그녀를 찾아왔다.
정여준의 마음이 지름길을 달리고 있었다.
/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자꾸 이 생각이 들어서 그러는데… 왜 이렇게 당신이, 익숙하고 그리운 거죠?”
제가 한 말에 본인이 더 놀랐는지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보였다. 민망해하는 그를 보고 그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또다. 그의 정신은 여전히 그녀가 알던 것보다 빨리 지름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가가 한 손으로 그의 눈을 덮었다. 뻣뻣하게 굳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맞대고 그녀가 말했다.
“왜냐면 당신은 날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난 당신이랑 백 년 가까이 같이 있었거든.”
손바닥 밑으로 그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있잖아, 방금 네가 한 말 모른 척하고 넘겨버린 게 지금까지 서른 네 번째인데…. 아무리 그래도 한 번은 정직하게 대답해주는 게 좋겠지? 내가 지금 시도하고 있는 뭔가가 계속 실패하는 중인데, 네가 시도한 그 질문도 자꾸 거절당하니까 보기에 별로 좋질 않네.”
그녀는 손을 떼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그래. 나도 당신이 그리워. 당신이랑은 다른 의미로 더 많이, 더 오래 그리워했어. 내가 아직도 만나지 못한 미래의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그녀는 과거 몇 번이고 했던 말에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난 네 옆에 있어도 괜찮아. 너 같은 사람이 돼도 괜찮아.”
/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뽀얗게 내리는 눈송이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그의 둥근 머리가 보였다. 손을 뻗으니 그는 배시시 웃었다. 그러더니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녀의 팔에 고개를 묻었다. 그녀는 절망에 가득 차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버석버석 마른 비명이 새 나왔다.
“이게 아니야. 네가 아니라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다고.”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그는 끝끝내 자신을 섹션의 사생아가 아닌 이경선의 후계자로 포장하길 택했다. 그렇게 살고 싶었고, 그 이름으로 죽고 싶었다.
그러니 어떻게 버리겠는가.
“난 네 옆에 있어도 괜찮아. 너 같은 사람이 돼도 괜찮아.”
그렇게 말해준 사람의 삶을, 미래를 어떻게 포기하겠는가.
/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그래, 우리 힘은 의지에 좌우되는 에너지야. 그게 무슨 뜼인지 이젠 정말 잘 알겠어. 이 능력은 의지를 가진 무언가를 건드리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난 죽음을 피하려 했던 사람은 어떻게든 살려냈는데, 죽을 각오를 했던 사람은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도 살릴 수가 없었어.” 그녀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왜 나정이는 자기가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까. 너는 왜 죽을 각오 따위를 했니. 네가 목숨을 던지지만 않았다면…, 네가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난… 그러면 내 능력은 널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몰라…. 아무도 꼭두각시가 되지 않고, 네가 날 구하려 하지 않고, 나도 널 구하려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구하지 않아도 네가 구해질 순 없을까….”
/ 8. 당신이 선택한 이야기
여자는 움찔하더니 그대로 그를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들짐승을 달래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위엔 우리 말고 없어. 난 복원자야. 우리 능력으론 서로를 다치게 할 수 없어. 그러니까 긴장하지 마.”
/ 9. 계단
죽어가는 얼굴보다는 차라리 이런 표정이 나았다.
그녀는 그에게 얼굴을 바짝 댔다. 코끝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 말 듯 했다.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우린 화해할 수 있어. 날 믿어. 부탁이야. 우린 화해할 수 있어. 그렇게 되도록 만들 거야. 비록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누군가는 죽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살 수도 있었던 친구가 죽는 일은 없을 거야. 믿어줘. 우린 반드시 화해할 거야.”
/ 9. 계단
처음으로 얻은 보상이었다. 그녀는 어서 정여준의 생존도 확신하고 싶어 자꾸만 발을 구르며 시계를 흘끔거렸다.
/ 9. 계단
윤서리가 목적에 실패해 시간을 돌릴 때마다 그 모든 순간의 정여준은 예외 없이 시간을 멈췄다. 고정된 시간은 하나씩 늘어가고, 윤서리와 정여준의 명령을 모두 따라야 했던 시공간은 매 순간 갈라져 분열했다. 과거가 반복되고 멈춘 시공간이 늘어감에 따라 그곳에 갇히게 되는 정여준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윤서리가 그를 살리는 데에 성공하고서야 외로운 반복도 끝을 맺었다. 최주상이 마주하고 있는 건 가장 처음으로 복제된 정여준이었다. 그의 뒤편, 수없이 겹쳐진 껍질 안쪽에는 무수한 정여준들이 자신을 제 공간에 가두고 다른 공간의 정여준을 인식하고 있었다. 멈춘 채 지속되는 한없는 시간을 감내하며,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기를 선택한 것이다.
/ 10.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그렇다고 하니 그러마 하겠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가영이… 윤서리를 저기 살려두고 왜 그렇게까지 견디는 거야?”
정여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최주상을 보았다. 그리고 먼 바깥에 환영처럼 스쳐 지나가는 윤서리의 모습을 보고,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겠어요?”
정여준은 미소 지었다.
최주상이 그를 완전히 처음 보는 낯선 이로 느낄 만큼 찬란한 미소였다.
“왜겠어요.”
/ 10.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