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우리는 존재의 특성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며, 자신의 모습을 결정하고 바꿔나갈 수 있을까. 아주 오랜 옛날이라고만 불릴 뿐 특정되지 않은 시절의 상상 이야기로 후대 사람들에게 전해진 그 어느날 밤, 노부부가 지어준 옷과 함께 우리가 얻은 것은 편리함인가, 저주인가.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인간 비슷한 것으로서 있을 수 있는지, 그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올까 하고.
그러니 자신이 이렇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어떤 모습으로 바뀌었을지 알 수 없는 여성을 이름만 갖고 수소문하는 일은 바람에 날려간 민들레 씨앗 가운데 하나를 찾기와 다르지 않아서, 안은 다만 미아에게로 한 걸음 가까워졌음을 위안으로 삼는다. 아마도 세상에 남은 유일한, 우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존재에게로.
아주머니는 철저히 멸시당하는 동시에 그 멸시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는 그악스러움이 생명력을 상징하기도 하는, 아이러니하면서도 대상화된 존재로, 그런 취급과 인식이 그리 새롭지는 않다. 사람들이 통틀어 옛날이야기라고 부르는 전설이나 신화, 민담에는 그런 이들 천지다. 저주와 천대와 박해를 받지만 사실은 유능하거나 은밀한 축복을 받은 이들이, 잘난 척하다 곤경에 빠진 친인척을 구해내고 기운 집안의 부를 일구거나 마을을 구한다. 미아는 형제들과 세상을 거닐 적에 그런 인간들을 비롯하여 그런 인간들을 부리고 버리는 인간들을 숱하게 만나보았으며, 그들에게서 삶의 대처 방식을…… 무엇보다 인간의 바닥을 배웠다.
“사라질 거니까, 닳아 없어지고 죽어가는 것을 아니까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육肉이라는 형태를 갖추고 나서야, 소리란 몸의 일부가 아니고 한순간 몸에 닿을 뿐 머무르거나 고일 수 없으며 매질을 타고 팽창하다 부서지고 흩어지고 사라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형태야말로 궁극의 빈곤이다.